https://jingkudesign.postype.com/post/15777616 (연말정산 틀 출처)
슬램덩크 (1-5월)
마치 약 15년 전 모든 오타쿠가 가히리와 은혼을 덕질하던 그 시절이 떠오르던 때였다. 아니, 그때보다 더했으려나? 나를 포함한 모든 오타쿠가 농구에 미쳐있던 시기. 실관람만 10회차 정도 했고 특전 때문에 예매 후 영혼만 보낸 것까지 합치면 그 이상이다. 공식굿즈 자체가 별로 없는 작품이다보니 영화 특전에 모두 목 매듯 집착했다. 더욱이 옛날 만화다보니 지금 아니면 언제 굿즈를 내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특전 수령하려 일산까지 운전도 해보고 팝업 간다고 롯데타워도 가고 돌비 본다고 코엑스, 아이맥스 본다고 용산도 가고...덕분에 수도권 방방곡곡 영화관 투어를 해봤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기력도 딸리고 현실에 많이 집중하다보니 이렇게까지 시간과 돈을 갖다 바친 덕질을 하지 못했었는데 슬램덩크 덕분에 물불 안 가리던 그 중학생 아기오타쿠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라 너무 행복했다. 이게 인생이지, 이걸 하려고 돈을 버는거지! 새삼 깨닫게 된 게 바로 슬램덩크였다. 심지어 주변에 만화 좀 본다는 친구들은 모두 농놀을 하고있어서 동네 친구들 모아 일요농구모임까지 만들어서 운영했다. 운동까지 하게 만드는 덕질의 순기능이랄까.
바람의 검심 (6월)
5월 말부터 슬램덩크 애정이 시들해지며 새 장르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게 바로 바람의 검심이었다. 어떤 계기로 보기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반기에 리메이크작이 방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원작을 찾아봤는지, 원작을 본 후 나중에 리메이크 소식을 들은건지. 아무튼 원작 다 읽을때쯤 애니 방영 시기도 딱 맞아 바로 애니도 감상하며 지금까지도 챙겨보고 있다. 애니플러스에서 선행상영회 한다는 것도 무작정 티켓팅부터 한 후 직장에 대충 둘러대고 조퇴한 다음 다녀왔다. 남자 팬이 많을 것같은 작품이라고 생각은 했다만 정말 관람객 대부분이 남자였다.
역시 난 이런 찬바라 만화를 좋아하는걸까. 성인 남자들의 그 고독함이 느껴지는 사무라이 만화. 그리고 그들 모두 하나같이 상남자라는 게 매력포인트지...
삼국지 (7-8월)
삼국지 덕질을 시작하게 된 경위가 좀 특이하다. 침착맨과 삼국지를 합친 팬메이드 영상을 보고 호기심에 그 영상의 소스로 사용된 중국 드라마 삼국을 보기 시작한 것... 워낙 삼국지 자체가 재밌는데다가 그 드라마도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보니 흡입력 있게 진도는 쭉쭉 나갔고, 편 당 40분 남짓 하는 드라마를 1.2배속으로 하루 최대 5편씩 시청하며 무려 95부작을 3주 만에 정주행 했다. 후반부엔 드라마가 끝나간다는 게 아쉬웠지만 결말이 너무 궁금한데다 빨리 연의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달렸다.
청소년 시절 엄마가 읽으라고 사주셨던 삼국지 전집. 당시엔 거들떠도 안봤지만 내가 성인이 되어서 이걸 읽을줄이야... 책장 한켠에 10여년 간 방치되어 있어서 책 윗부분에 온갖 먼지도 쌓이고 심지어 아예 얼룩덜룩 변색까지 되어버렸지만 청소기로 한번 싹 닦고 열심히 읽었다. 지하철에서 틈틈이 보고 집에서도 일어나자마자, 자기 전에 항상 끼고 봤다. 이렇게까지 독서를 열심히 한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지.
유비 사후부터는 급격히 노잼 되면서 읽는 속도가 많이 줄었다. 그때부터는 지하철에서만 읽은 듯. 심지어 11월 초까지도 다 못 끝냈었다. 남만 정벌 부분은 아예 게임으로 스토리를 익힐까 싶어서 삼국지 공명전을 다운받아서 해봤는데 금새 흥미가 식어서 지금은 안 들어간지 오래다.
삼촌 집에 있는 요코야마 미츠테루 만화 삼국지도 볼 목록으로 찜 해놨는데 다른 거 보느라 미뤄지는 중이다. 엄마가 삼촌한테 책 빌려달라고 말씀 드려놨는데... 스팀에서 구매한 삼국지13도 해야되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나네...
킹누 (9월)
킹누 콘서트 한 번 가보는 것이 인생 소원이었던 사람이 바로 나다. 작년 섬머소닉에 킹누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코로나를 뚫고 일본으로 원정을 가 보려고 별 수단을 다 찾아봤지만, 사실 코로나가 문제는 아니었고 일본 공연을 외국인이 관람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외국인 신분으로 보기 힘들다면 아예 일본에 거주해버리는 건 어떨까 싶어서 올해 여름 일본 워킹홀리데이 정보를 미친듯이 찾아봤다. 진심으로 킹누 콘서트를 위해 워홀을 갈 생각이었다. 물론 간 김에 내가 좋아하는 다른 일본 아티스트 공연도 보고 애니 덕질도 마음껏 할 생각이었지만.
하지만 워홀보다 더 싸게 먹히는 수단을 찾았다. 일본 핸드폰 번호를 발급받아서 공연에 응모하는 것. 알고보니 일본 공연 원정 갈 때 많이들 쓰는 방법이었지만 나는 모든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정보를 알아보느라 꽤 힘들었다. 지금은 모두 준비를 마친 상태이지만 아직 일본 번호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테스트를 해본 게 아니기 때문에 마음 한 켠에 불안함도 남아있다.
콘서트 응모를 위해 앨범도 구입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배송대행지도 사용해보고 정말 처음 해보는 별짓을 다 해봤다. 돈도 많이 깨졌지만 콘서트 응모에 당첨됐다는 그 문자를 받은 순간은 정말 올 한 해 중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니었는지.
하트스틸 (10월)
루머로만 돌았었던 롤 챔프로 구성된 보이그룹, 진짜로 나왔다. 내 최애 챔프 세트가 포함되어 있어서 특히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라면 그냥 잠시 관심만 가졌다가 끝났었을텐데 콜라보 도넛을 출시하고 심지어 랜덤포카를 준다길래 바로 상술에 넘어갔다. 오타쿠는 랜덤포카 가챠 절대 못 참지. 도넛 출시 첫날부터 갈까 생각은 했지만 위치가 집에서 너무 먼 데다가 평일에 도넛 사고 바로 출근하는 것도 일이었기 때문에 미루고 미뤘는데 어느새 입소문을 탔는지 오타쿠들과 되팔렘들이 가게 오픈런을 하기 시작했다. 쾌적할 때 진작 갈걸 하고 미친듯이 후회했지만, 해결 방법은 나도 똑같이 오픈런을 하면 된다는 것. 아침부터 출근길 지옥철을 뚫고 서울에 가서 두 시간 줄을 기다려서 도넛을 박스 단위로 사왔다. 가족들도 나눠주고 직장 동료들도 나눠주고. 다행히 도넛이 먹을만해서 돈 아깝지는 않았다. 친구들이랑 2차로 또 오픈런해서 일반 포카 2세트 맞추고 레어 카드도 좋아하는 멤버들은 모두 갖춰서 만족스러운 덕질이었다. 도넛 구매 후 매장에서 돌아다니며 포카 교환하던 것도 재밌었다. 이것 때문에 롤 다시 복귀할까도 생각했지만 정신병자 소굴에 제 발로 들어가기는 너무 무섭기도 하고, 콜라보가 끝나니까 오픈런 하던 광기는 싹 사라지고 애정도 금방 식어버렸다. 신곡 나오면 다시 덕질하겠지.
초한지 (11월)
삼국지 덕분에 중국 고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한지는 삼국지 내에서도 인용이 많이 되었기에 삼국지를 다 보면 바로 초한지를 보리라 예정해놨었고, 11월 초 드디어 연의를 다 읽은 후 바로 드라마 초한전기로 시청 시작.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드라마가 유방이 동네 정장 하던 초반 분량이 커서 솔직히 지루했다. 빨리 전쟁하는 모습 보고싶은데 왜 동네 아저씨들이 쓸데없는 싸움이나 하는 모습을 봐야하는 건데. 근데 한신이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나서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삼국지보다 초한지를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이유를 알겠더라. 물론 난 삼국지파.
지금은 드라마 다 보고 만화 초한지로 스토리 복습중인데 이 문정후 초한지가 액기스만 모아놔서 스토리 파악이 쉽다. 책으로도 읽을 예정이었는데 요즘 또 애정이 시들시들해져서 언제 읽을지 모르겠다.
시끌별 녀석들 (12월)
22년도에 애니 리메이크작이 나왔지만 최근에서야 드디어 라프텔에 들어왔다. 리메이크 소식 처음 듣자마자 내가 정말 보고싶어 했던건데, 이제서야 정식 루트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소 정신 산만한 애니였지만 역시 고전 명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은 다 이유가 있는 법. 너무 재밌다. 게다가 애니 때깔도 좋아서 보는 맛이 있었다. 라무를 정말정말 예쁘고 귀엽게 그렸다...
애니 중반부터인가 멘도가 내 최애로 마음 속에 입주해버렸고, 바로 만화책 전권 소장에, 오프라인에서 구할 수 있는 각종 굿즈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도 멘도가 내 최애로 중심을 딱 차지하는 중이다. 멘도 덕분에 한동안 손 놓았던 그림도 다시 시작했고 픽시브에 업로드 된 각종 팬아트와 2차 창작 만화를 보며 일본어 공부까지 하는 중이다. 이것 또한 덕질의 순기능이지.
종합하면 킹누와 하트스틸 덕질을 잠시 했던 걸 제외하면 모두 고전작품들인 게 참 나 답다. 꼰대 오타쿠라 요즘 작품을 멀리하고 고전 위주로 찾아보거나 보던걸 또 보는 성격인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정말이잖아? 하지만 슬램덩크도, 바람의 검심도, 시끌별 녀석들도 결국 신작이나 리메이크작 덕분에 덕질한거 보면 아무리 기존 팬을 많이 보유한 고전작이라 해도 새로운 컨텐츠 덕분에 나 같은 신규 팬을 유입시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