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드디어 귀멸의 칼날을 완결까지 읽었다. 건장한 청년 무사들이 답지 않게 동글동글하게 생긴 것이 영 끌리지 않아서 안 보고 있었지만 화려한 영상미와 후반 스토리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어찌어찌 완주를 성공했다.
명성에 비해서는 많이 실망한 작품이다. 실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평면적인 캐릭터들과 서사를 푸는 과정이다.
1. 평면적인 캐릭터들
(1) 탄지로의 비현실적일 정도로 완벽한 성품
귀멸의 칼날은 명백히 소년만화 장르이며, 소년만화란 주인공의 내적, 외적 성장을 통해 적을 무찌르는 장르 아닌가? 그럼 탄지로는 작중에서 성장을 했는가? 탄지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인군자였다. 어떤 유혹에도 절대 넘어가지 않고, 광적일 정도로 네즈코에 집착을 하며 언제나 목표를 잊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적 성장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성인 캐릭터라면 완성된 내면을 갖고있다 한들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지만 탄지로 같은 청소년 캐릭터가 흔들림 하나 없이, 절망 한 번 없이 목표를 완수한다는게 너무 비현실적이라 공감을 전혀 할 수 없었다.
(2) 주변 인물마저 동일함
탄지로가 이미 완성된 인격을 가졌다면 주변 주요 인물들 중에서라도 멘탈이 불안하여 절망도 하고 배신도 하는 캐릭터가 하나쯤 나올 법도 했지만 귀살대원들은 모두 하나같이 올곧은 마음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특히 렌고쿠에게 실망감이 가장 컸다. 첫 등장부터 기개 넘치고 용맹하고 바르고 흔들림 하나 없는 성품을 보고 나는 오히려 불안했으며 동시에 기대했다. 이렇게 완벽해보이는 인물이라면 분명 마음 속에 오랜 어둠 하나쯤은 품고 있을 것이며, 그것이 곪아 결국 터져버려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렌고쿠의 회상 장면을 보니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그 과거 때문에 더더욱 렌고쿠는 분명 마음의 그늘이 있을 것이라 확신을 했건만... 끝까지 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싸웠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렌고쿠가 배신을 때리거나 적에게 강제로라도 붙잡혀서 혈귀가 되는 전개를, 그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아무리 픽션이라도 그렇지 세상에 죽음을 무릅쓰고 지조를 지키는 이런 인물이 있다고? 그것도 렌고쿠 한명이 아니라 귀살대원 모두가?
사실 죽을 때까지 자기 철학을 굽히지 않는 캐릭터야 숱하게 있지만 그들도 불편한 과거 한둘 쯤은 있기 마련인데(생각나는 캐릭터 중에는 바람의 검심의 켄신, 사이토), 귀살대원은 그늘 한 점 없는 빛의 영역에 살며 끝까지 그늘 없이 밝은 세상에서 티 없이 맑은 마음을 품은 채 살아갔다. 이렇게 흠이 없는 인물은 온갖 지저분하고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들 사이에 딱 한명 정도 존재해야 빛을 발하지만, 모두가 빛나고 있으니 오히려 아무도 돋보이지 않았다.
(3) 악역들마저 동일함
그나마 혈귀들이 귀살대원들보다는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지니고 있다. 주요 혈귀들 대부분 나름 불쌍하고 기구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연을 푸는 과정이 부족했으며(뒤에서 다룰 예정) 불쌍한 과거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 작품 시점 내에서는 악행만 저지르다 갔으니, 배신해서 귀살대에게 붙는 혈귀나 그것도 아니라면 무잔으로부터 독립하며 제 3의 세력을 만드는 혈귀 하나쯤은 만들 법도 한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누군가는 타마요를 예시로 들 수도 있겠으나 타마요는 애초에 등장 시점부터 귀살대 편으로 나왔으니 적어도 독자들 입장에서는 무잔을 배신한 입체적인 인물은 아니다.
귀살대에서는 렌고쿠에게 배신의 희망을 걸었듯, 혈귀들에서는 아카자에게 배신의 희망을 걸며 작품을 봤다. 왜냐하면 아카자는 그나마 인간성이 남아있으며 인간을 죽이겠다는 욕구보다 무예 단련을 더 우선시하는 혈귀로, 다른 혈귀들과는 궤를 달리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귀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사기적인 무잔의 설정 때문인가, 배신 때리는 혈귀는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었으면 무잔이 바로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 결국 무잔의 이 오버스펙도 작품의 단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2. 서사를 푸는 과정
(1) 훈련 과정을 압축시킴
탄지로의 내적 성장, 즉 정신적인 성장은 없었다고 위에서 얘기했다. 그럼 외적 성장, 즉 기술적인 성장은? 있었다. 있었지만 단 1~2화 안에 압축시켜 놓았다. 초반부터 작품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탄지로가 강해지기까지 얼마나 훈련했는지 몇몇 장면과 독백 몇분으로 떼워놓고 물의 호흡 어쩌구 하는 기술을 쓰기 시작한다. 그 호흡이 뭔지 ,어떻게 터득했는지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 바위 자르는 에피소드가 있긴 했지만 그 동안 소년만화 주인공들이 파워업 했던 과정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스토리다.)
심지어 이노스케는 그냥 강하다. 그렇게 강해지려면 분명 고생했을텐데 어떤 고생을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조연이라면 그럴 수 있어도 주연은 강해지는 과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성장스토리고 소년만화니까.
주변 사람들의 의견과 여러 견해들을 참고한 바로는 이게 요즘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쌓는 빌드업을 요즘 사람들은 답답해서 견디지 못하고 빠르게 알맹이만 보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경 설정이나 기술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는 건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노력이 드러나지 않은 채 강한 모습만 보여주는 건 마음에 와닿을 수가 없다.
(2) 과거 사연을 몰아서 넣음
캐릭터들은 저마다 과거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것들을 풀어내는 과정이 매번 똑같다. 특히 혈귀들의 과거는 주마등으로 몰아서 등장할 뿐이라 그 혈귀가 죽기 직전에야 얼마나 불쌍한 놈이었는지 알게 된다. 사연 있는 악당, 나도 정말 좋아하는 유형이다. 그 사연에 대한 떡밥을 미리 맛보기로 뿌려놓고 독자들로 하여금 궁금해하게 만든 후 천천히 풀어나가는 그 맛에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유 모를 악행을 잔뜩 저질러놓은 애한테 뒤늦게 이유를 부여해줘봤자 동정심이나 공감을 사기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사연 있는 악당에게 빠져드는 계기는 바로 그 사연인데, 사연을 풀어줬을 땐 이미 그 캐릭터에게 빠져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귀살대원들의 과거를 푸는 방식도 혈귀들보다 조금 나을 뿐, 갑자기 몰아서 등장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회상 장면이 너무 길게 나온 나머지 '지금 무슨 싸움 하는 중이었지?' 하며 스토리를 까먹기도 했으며, 심지어 무이치로 과거 나올 땐 졸았다. 특히 무이치로의 개과천선 내용은 참 아쉽다. 냉정했던 사람이 온화하게 변한다는 서사는 그 캐릭터를 굉장히 매력있게 만들어주는 치트키라고 생각하는데, 무이치로는 그 치트키를 가지고도 매력을 뽐내지 못했다고 본다. 무이치로가 인간미를 되찾았을 때 드는 생각은 '그래, 이 녀석 사실 따뜻한 놈이었다구!' 가 아니라 '...갑자기?' 였다. 갑자기 과거사를 줄줄이 보여주더니 갑자기 각성하는 무이치로. 머리로 스토리를 이해했더라도 마음으로 그 감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인간성을 되찾을 조짐을 조금씩 보여줬어야 내 마음도 조금씩 거기에 따라갔을텐데 너무 갑자기 사람의 인격이 바뀌어버릴 정도로 템포가 빨랐기 때문이다.
(3) 뜬금 없는 러브스토리
무이치로의 각성만큼 뜬금없는 부분이 바로 칸로지와 이구로의 러브스토리다. 정말 뜬금없이 이구로가 칸로지에게 양말을 선물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이구로가 왜 칸로지에게 호감을 가진건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둘이 같이 임무를 맡아 생사를 넘나들며 정이라도 들었다면 그 정이 드는 과정을 보여줬어야 했다. 과정이 생략되었다는 점에서 (1) 훈련 과정의 부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과정이 나오지 않으니 이 커플의 매력도 모르겠으며 딱히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헤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원래 남의 로맨스는 이어질 듯 말 듯 그 쫄깃함을 갖고 응원하는 맛에 보는 것인데... 차라리 로맨스가 아예 없었다면 좀 나았을까.
총평 : 선한 상남자들의 초고속 싸움 스토리
상남자, 하남자라는 유행어를 제법 사용하는 편이다. 자기 가치관을 끝까지 지키며 다소 무리하더라도 흔들림이 없는 인물상을 상남자, 부족한 정신력이나 열등감 등을 안고 절망도 해보고 악행도 저질러보고 후회도 해보는 인물상을 하남자라고 칭하겠다. 귀살대원들은 모두 상남자, 상여자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입체적이고 매력있는 캐릭터란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법. 최소한 한순간이라도 배신할지 말지 내적 갈등이라도 했거나, 어느 쪽에도 붙지 않고 제 3의 세력으로 빠지는 인물이 한명 쯤 나왔어야 했다. 즉 하남자들을 대거 등장시켜야 이야기가 재미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