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넘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 특히 현재 나 같은 결혼 적령기 여성들에게 여전히 깊은 공감과 고뇌를 안겨주는 소설이다.
재작년, 고등학교 동창이 결혼한 이후 즈음부터 결혼과 출산에 대해 굉장히 고민중이다.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어디서 상대를 찾는가, 아이를 낳는다면 더 늙기 전에 서둘러 결혼을 해야 할 것인가, 빠른 만남을 위해 눈을 낮춰야 하는가, 그렇게 만난 상대와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는가,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못다 이룬 내 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이를 낳고 싶은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굳이 고르자면 낳고 싶다는 쪽이다.
이유는 이러하다. 많고 많은 생물종 중에 포유류 암컷으로 태어났는데,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임신, 출산 능력을 갖고 태어났는데, 죽기 전에 새끼를 가져보고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모성애를 느껴보고 싶다.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자식에게 무조건 희생하는 '엄마'라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엄마가 된 사람들은 모두 자식이 주는 기쁨이 세상 모든 것 중에 으뜸간다고 여기고 찬양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강요하다시피 권유하는데, 그렇게나 좋은 것을 못 누려보고 죽는 것은 너무 아까운 짓이 아닐까? 내가 지금껏 누려본 행복의 한계를 100이라고 믿어왔지만 아이를 낳으면 행복의 한계를 200으로 갱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기에 더더욱 아이를 낳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철저하게 나의 행복을 위해 낳고 싶어하는 것이다. 내가 직접 낳아보기 전까지 진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 모성애 한 번 찍먹 해보겠다고, 진짜 행복의 한계가 100이 아니라 200인지 확신도 없는 것 한 번 테스트 해보겠다고 최소 20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생명 하나를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혼을 하고 싶은가?
이것 또한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지만 안 하고 싶다는 쪽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눈 뜨고 감을 때까지 모든 하루를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혼자 살아오며 누리고 있는 이 편안함을 쉬이 포기하기 힘들다.
사실 그것보다, 이제는 내가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런 거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 가슴으로는 난 여전히 운명같은 사랑을 믿고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내 평생을 함께 해야 할 상대'라는 하늘의 계시를 믿고 있다. 그런 계시가 내려오는 상대가 아닌 이상 결혼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그 계시는 어떤 상대를 만나야 받을 것인가? 잘 생기고, 키 크고, 성품 좋고, 성향도 맞으며, 성실히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 모든 걸 갖춘 사람은 나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제는 슬슬 환상으로 남겨두려 하고 있다. 결국 그런 사람은 환상이 되고 나면 난 영원히 계시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가서 몇 가지 조건을 포기하고 타협해서라도 결혼을 할 것인가?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고싶지는 않다.
유전자만 받는 방법
아이를 낳는다면 좋은 유전자를 갖춘 남자에게 생식세포만 제공받고 싶다는 생각을 쭉 해왔다. 정자은행 같은 방법도 있지만 미혼 여성이 이용하기에 국내에서는 힘든 방법이고, 그렇다고 큰 돈 들여 해외로 나갈 능력은 안 되므로 적당한 상대에게 기증받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원나잇, 뭐 그런 방법을 떠올릴 수 있지만 난 그런 깜냥이 없는 사람이고, 신변도 모르는 남자의 유전자를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나 내 주변 남자 중에 이런 나의 생각을 이해하고 나에게 생식세포를 기증해줄 사람이 존재하지는 않을까 하는 망상을 종종 했다. 이런 이야기 꺼냈다가 이상한 여자로 소문이 퍼져버릴 것 같기에 당연히 실천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만에 하나 기증할 남자를 찾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미혼모로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지금 이렇게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들어서 허덕이고 있는데 내가 과연 혼자 돈까지 벌어 가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내 꿈은 포기하는 것인가?
난 아직 밴드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남아 있다. 검도도 열심히 다녀서 어디 가서 검도 좀 한다고 꺼드럭댈 수 있을 만큼 실력을 기르고 싶고, 좋아하는 만화 2차 창작도 그리며 살고 싶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이걸 포기하지 않으면 아이를 낳고 기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중 밴드는 특히나 평생 미련이 남을 것이다. 내 인생 전반에 걸쳐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온 것이고 내 자아가 가장 크게 담겨 있는 분야이기에, 인생에서 이 큼지막한 분야를 전부 앗아간다면 인생에 큰 구멍이 하나 뚫릴 것만 같다.
그럼 난 집에서 아이를 안아들고 재우면서 내 친구들이 여전히 아마추어 직장인 밴드 활동 하면서 1년에 두어 번씩 공연하고, 몇몇은 앨범 발매하고 프로 뮤지션으로 데뷔하는 그 모습을 보며 부러움과 질투심을 느끼며 살아갈 게 뻔하다. 영원히 채우지 못할 열등감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여자에게 임출육은 기간 한정 이벤트
결혼과 임출육을 해도 지는 것 같고 안 해도 지는 것 같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이 숭고한 행위에 이기고 진다는 표현은 너무 불경한가? 하지만 정말 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걸 해버리면 내 꿈은 최소 20년 동안 봉인되고, 꿈은 커녕 사회 활동조차 제한 당한다. 아무리 육아 휴직 등 육아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잘 만들어져 있다 해도 최소 몇 년은 필연적으로 '집에서 애나 보는' 삶으로 바뀐다. 그동안 난 그렇게나 좋아하던 밴드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그림도 못 그리고 친구도 못 만나고 사회 활동도 못 한다. 철저하게 내 자아는 죽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걸 안 해버리면 '서른 살 전후 아직 늙지 않아 건강한 신체적 컨디션과 가정을 꾸리기 적당한 경제적 능력'을 갖춘 이 최적의 시기에만 할 수 있는 '기간 한정 이벤트'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몇 년 더 지나면 건강하게 출산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할 거면 지금 해야 한다. 남자보다 여자가 결혼과 출산에 더 깊게 고민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포인트가 바로 이 점이다. 여자는 '기간 한정 이벤트'라는 것. 가임기라는 것이 존재하며 사실상 서른 다섯 살, 후하게 잡아도 마흔 살이 넘어가 버리면 건강하게 임신 및 출산을 할 수 없다. 그럼 아이를 낳을지 말지 난 앞으로 5년 안에 결정을 해야 한다. 임출육을 안 하는 선택을 한다면, 마흔 살이 넘었을 때 엄마가 된 다른 친구들에 비해 끝내주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 한, 나는 황금 같은 시기를 놓쳐 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채리티의 선택은 어떠한가
분명 독후감인데 이제서야 책 이야기를 하자면, 주인공 채리티의 선택이 나에겐 다소 충격적이었다. 하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채리티가 직감한 후부터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의 아이를 가졌음에도 이를 밝히지 않고 하니를 떠나보낸 것, 양아버지나 다름 없는 로열씨와의 결혼에 순응한 것. 이전까지 채리티의 반항기 어린 태도, 사랑에 빠진 모습은 전세계 10대, 20대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내용이었는데, 충격을 느낀 기점은 바로 채리티의 임신부터이다. 즉, 여자가 임신을 하면 이렇게나 가치관과 태도가 바뀐다는 것인가? 내가 아직 임신을 안 해봐서 임신 이후의 채리티에게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 이후로 채리티는 멋진 남자 하니와 못다 이룬 사랑, 돈을 모아 시골 동네를 탈출하겠다는 꿈을 모두 뒤로 한 채, 그토록 싫다고 바락바락 대들었던 상대인 로열씨와 결혼하여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을 택한다.
이 책은 채리티처럼 현실과 타협하여 안정을 택하는 삶이 정답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채리티의 선택이 체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기에, 결코 최선의 선택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채리티가 하니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고 하니에게 달려갔다면 그것이 최선의 결과를 낳았을까? 채리티를 나몰라라 하고 버리든, 파혼을 하고 채리티와 아이를 먹여 살리든 하니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며, 하니에게 버려지든, 남의 약혼을 깨버리고 신분 차이 느껴지는 남자와 살아가든 채리티 또한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이 로열씨를 택했을 것이다. 한때 꿈꿨던 것을 뒤로 하고 적당한 신랑감을 찾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웠을 것이다. 현대에는 어떤가? 하니를 선택하여 어렵고도 불 같은 사랑을 하는 여자, 사랑이 뭐가 중요하냐며 돈 모아서 시골동네 탈출 성공하는 여자 등 다양한 삶을 사는 여자들이 분명 많아지긴 했다. 하지만 여자로 태어난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임신'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여자들은 100년 전의 채리티와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아쉽고 미련이 가득 남을 것 같은 가불기 이지선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