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MA에 관하여
10년 전 작품을 처음 볼 때도 나는 주인공 삼인방에게 공감도 안 가고 정도 안 갔다. 앞뒤 안 보고 오로지 거인 박멸에만 집착해서 대화가 안 통하는 에렌, 그런 에렌의 어떤 점이 좋다고 에렌만 바라보고 사는지 더더욱 이해할 수 없고 결국 에렌이랑 똑같이 대화가 안 통하는 미카사, 셋 중 그나마 봐줄만 하지만 외형도 성격도 취향이 아니라 별로 정 안 가는 아르민.
10대의 나는 캐릭터에 대한 관용이 부족했기 때문에 성인이 된 지금 보면 감상이 달라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그냥 이 삼인방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나 보다. 오히려 10년 전에 본 에렌은 작중에서 어렸기 때문에 좀 양보하면 그 막무가내인 태도를 이해할 수 있지만, 다 큰 극장판의 에렌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꼭 그랬어야만 했냐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오히려 작중에서 정신세계 속에서 아르민과 대화할 때, 미카사가 나만 봐주면 좋겠다고 꼴사납게 울면서 소리치는 게 더 그 나이대 청년 같고 공감이 가서 좋았다. 아주 잠깐 뿐인 장면인 게 아쉬웠을 정도로. 미카사는 끝까지 고집부리거나 집착하지 않고 결심해서 에렌의 목을 잘랐기에 10년 전보다 평가가 올라갔으며, 아르민은 그냥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한참 진격거 덕질할 때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랬던 거에 비해 이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게 정이 깊지 않은데, 주인공 삼인방 탓이 크다고 본다. 이 세 명을 보는 내내 못마땅하다면 작품을 보는 재미가 반감될 수 밖에.
- 리바이에 관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리바이, 나 역시 정말정말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다른 간부들처럼 일찍 죽었다면 리바이를 더욱 성스러워하며 모실 수 있었겠지만, 끝까지 리바이를 죽이지 않아줘서 작가에게 감사하다.
리바이가 마냥 과묵하고 폼 잡고 시크한 캐릭터였다면 차라리 불구가 된 채로 살리는 것보다 곱게 죽어주는 게 더 성스럽게 추앙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리바이는 일할 때 열심히 일하고 동료와 부하를 아끼고 당황하기도 하고 농담할 땐 농담할 줄도 아는 '인간'이기에 오히려 처절하게 살아남은 것이 더 결말로서 만족스럽다.
참 기구하게도 살아온 리바이, 내가 정말 사랑하지만 난 그런 리바이가 작중에서 구르고 고통받는 게 참 좋았다. 엘빈을 잃었을 때, 죽다 살아났을 때, 한지를 잃었을 때, 그럴 때마다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아주 작게나마 드러나는 괴로운 표정을 보는 카타르시스가 대단했다. 꺼이꺼이 울어도 모자랄 일들만 잔뜩 겪었으면서 속으로만 슬픔을 삭이는 어른의 면모도 너무 좋았다.
- 에루리와 리바한지
그런 리바이의 숨겨진 모습을 엘빈 또는 한지만 알았으면 좋겠다. 에루리와 립한은 각자 다른 매력이 있는데, 둘다 수많은 사선을 넘나든 동료라 그런지 아주 진득한 맛이 있지만 그 진득함은 에루리가 한 수 위이다. 아커만과 주군 사이의 피로 이어져 있는 끈끈함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리바이가 엘빈에게 그렇게 충성했던 이유가 아커만의 피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짜릿했던지.. 거스를 수 없는 복종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는 게 얼마나 꼴리는 포인트인가. 그에 반해 립한은 에루리보다는 덜 진득하지만 훨씬 편안해서 좋다. 먹먹하고 아련한 에루리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장난스러운 상황과 즐거운 상황이 립한에게는 그려진다. 한지의 그 성격 덕분이겠지. 그렇다고 한지가 마냥 허허실실한 사람은 아니고 진지할 땐 진지하기 때문에 다양한 모습을 그릴 수가 있다.
리바이는 엘빈과 함께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본인은 굳게 믿겠지만, 사실 리바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엘빈이 아니라 한지라고 생각한다. 엘빈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하는 영원의 첫사랑 같은 느낌이라면, 한지는 정말 결혼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라이너에 관하여
진격거에서 최애가 누구냐고 물으면 리바이와 라이너, 이렇게 두 명을 항상 꼽는다. 둘 다 서로 다른 매력이 있기에 둘 중 누구를 최애라고 단정짓기가 예전부터 힘들었다. 일단 공통적으로 둘 다 작중에서 고통받고 잔뜩 구르는 모습을 참 좋아하는데, 리바이는 그렇게 굴러도 마음이 꺾이지 않고 내색하지 않는 어른이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라이너는 실제로 어려서 그런지 마음도 꺾이고 내색도 많이 했는데, 이런 점이 라이너의 강인해 보이는 외모 및 떡대와 대비되는 것이 꼴림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자아분열해서 오락가락하는 모습, 마레에 돌아가서 수염까지 길러 남성미가 넘쳐나는 외모와는 다르게 항상 괴로움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을 지으며 자살시도까지 간 그 모습이 정말 내 마음을 불태웠다. 남자란 남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법. 그치만 정신이 무너질 대로 무너져서 한껏 강한 척을 해도 표정이 늘 어둡고 죽상인 라이너를 보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남자의 약한 면을 나 혼자 엿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 봤다기에 라이너는 여기저기 그 나약함을 질질 흘리고 다녔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약한 남자가 변신하면 '갑옷' 거인인 것도 매력적이다. 이름값 못한다며 쿠사리 먹었지만 그래도 거인 중에 가장 디자인이 잘 뽑히지 않았는가(주관적). 제일 나약한 꼴찌놈이 제일 멋진 변신을 하는 게 참 좋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추구하는 모습, 또는 나의 모습과 닮기도 한 것 같다. 믿어왔던 정의를 위해 해야할 일을 열심히 수행하지만, 수행을 잘 해냈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또한 수행하는 과정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자신의 나약함에게 져서 괴로워하는 게 특히 요즘의 내 모습 같아서 라이너에게 더더욱이 정감이 간다. 라이너가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라 좋다.
진격의 거인이 일본 연재만화 치고 참 괜찮게 끝났다. 이상한 전개로 흘러가고 용두사미로 끝나는 작품이 허다한데도 불구하고 진격거는 내용이 산으로 가지도 않고 떡밥도 잘 회수하고 결말도 맥락에 맞게 끝낸 수작이다. 하지만 난 이 작품의 스토리보다는 캐릭터에 칭찬을 하고싶다. 주인공 삼인방은 내가 안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다른 주변 캐릭터들은 정말 개성있고 인간적이고 입체적이기 때문에 정말 마음에 들었다. 특히 마레에 사는 에르디아인이 그렇다. 입체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입장의 사람들이라 그런가. 무엇이 정의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이쪽 편에 섰다 저쪽 편에 섰다 갈팡질팡하고 그런 점이 매우 호감적으로 그려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과 당위성을 잘 보여줬기 때문이겠지.
스토리, 캐릭터, 대중적 흥행, 오타쿠적 흥행까지 모두 이룬 괜찮은 작품이 끝까지 괜찮게 끝나서 정말 만족스럽다.